상처 위에 색을 칠했더니 어느새 그게 나를 감쌌다
- 마음이 무너지는 날엔 말보다 물감이 먼저 닿았다
삶은 종종 아무런 경고 없이 무너진다
하루아침에 누군가를 잃기도 하고
오랫동안 준비했던 일이 한순간에 부서지기도 한다
그런 날엔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친절한 조언도 따뜻한 메시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더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작은 종이와 색연필을 꺼낸다
무언가를 잘 그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냥 손이 가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선을 긋고
색을 입힌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선들과 색들이
조용히 나를 끌어안는다
마음은 설명을 거부할 때가 있고
그럴 땐 오히려 비언어적인 행위가
가장 직접적인 위로가 된다
그림은 그런 도구였다
비록 어설프고 때로는 난잡해 보이더라도
그 안엔 분명히 나의 감정이 담겼다
그림을 그리고 나면
어떤 정리가 된 듯한 느낌
마음이 조금 정돈되는 듯한 경험
그건 정말로
말 대신 그린 감정의 일기였다
- 그리지 않아도 예술이 나를 대신 그려줄 때
예술을 직접 창작하지 않아도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은 회복될 수 있다
나는 힘든 시기에 자주 미술관에 갔다
혼자였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그 공간이 주는 침묵이 오히려 좋았다
작품 앞에 서면
작가의 삶이 비치는 순간이 있다
그도 슬펐겠구나
그도 고독했겠구나
이 그림을 그릴 당시 그는
어떤 감정으로 팔을 움직였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자신의 감정이 조금씩 해체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고통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어떤 감정도 끝내 표현될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은
내 안에 남은 슬픔을 조금씩 풀어준다
예술 작품 하나가
내가 꺼내지 못한 감정을
대신 표현해줄 때가 있다
그건 어쩌면
가장 조용한 공감이다
말도 없고 설명도 없지만
나도 그런 감정이 있었어라는 메시지를
붓 끝으로 색으로 질감으로 전해준다
그때 나는 알았다
회복은 어떤 거대한 전환이 아니라
이런 작은 공감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다는 걸
-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상처를 주체적으로 다루게 된다
슬픔이나 분노 상실 같은 감정은
그 자체로 너무 커서
가만히 두면 오히려 우리를 삼켜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감정을 밖으로 꺼내는 행위
즉 표현이 필요하다
그림은 그 표현의 방식 중
가장 안전하고 자유로운 형태였다
말은 오해될 수 있고
글은 너무 구체적일 수 있지만
이미지는 모호하고, 그래서 자유롭다
누구도 내 그림에 대해
그건 잘못된 감정이야라고 말할 수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마음을 시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이 된다
감정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건 회복의 첫걸음이다
나는 종종 아주 어린 아이처럼
원색으로만 그림을 그릴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감정이 내 통제 아래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다
표현이란 결국
마음의 외출이다
그 마음이 바깥 공기를 마시고 돌아오면
조금 더 부드럽고 편안해진다
- 예술은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를 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술은 잘하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미대 출신도 아니고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며
무대에 서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표현하고자 했고
느끼고자 했으며
그걸 통해 나를 조금이라도 꺼내고 싶었다는 마음이
가장 중요했다
치유로서의 예술은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건 마음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색 기울어진 선
어울리지 않는 구성일지라도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온도가 담겨 있다
나는 가끔 친구들과
예술 치료 모임처럼 작은 워크숍을 연다
그림을 그리거나, 종이로 조형을 만들거나
서로의 감정을 이미지로 표현해본다
그리고 모두가 말한다
생각보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어
그림을 통해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더라
무너진 마음은
절대 순식간에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은
그 무너진 조각들 사이에
조용히 빛을 흘려 넣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 조각들을 붙이기 시작할 수 있다
예술은 약이 아니다
하지만 상처 위에 붙이는 천천한 손길이 된다
예술은 해결책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다리가 된다
무너지는 마음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창작이 아니다
그건 회복이고
자기 구원이고
아주 조용한 저항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언젠가 삶이 무너지는 날이 있다면
그 위에 무엇이든 하나
그려보길 바란다
그 선 하나 색 하나가
당신을 다시 걷게 할지도 모르니까